<국보 제198호 丹陽 신라 赤城碑.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로부터 丹陽땅을 탈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拓境碑다.>
浮石寺(부석사)에 대한 첫날 오전 답사를 끝낸 다음, 필자 일행과 동행했던 영주시 문화관광과 宋俊泰 학예사에게 영주에서 가장 특색 있는 향토음식점에서 점심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가 안내한 음식점이 順興面(순흥면) 읍내1리에 있는 「순흥전통묵집」이었다.
여기서 경북 영주시의 金鍾根 행정지원국장·권혁태 문화과장 등을 한꺼번에 조우하게 되었다. 그들도 이곳 가까이에 있는 소수서원에서 金晉榮 시장이 참석하는 관광객 맞이 행사에 참석한 뒤에 점심을 먹으러 왔다가 필자 일행과 합석하게 된 것이다.
가늘게 썬 도토리묵 채에다 밥을 비비는 묵밥은 양념장 맛과 어울려 고소하면서도 담백하다. 값 1인당 3500원. 여기다 동동주 한 사발까지 곁들이니 과연 별미다. 金국장은 『전통묵밥 팬들은 중앙선 기차를 타고 가다가도 일부러 하차하여 먹고 간다』는 둥 향토음식 자랑이 대단하다.
전통묵집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국보 제111호 晦軒影幀(회헌영정)을 모신 紹修書院(소수서원)으로 직행했다. 부석사가 좋긴 하지만, 마침 관광객이 몰리는 일요일이었고, 또 한꺼번에 오래 매달리면 오히려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날은 참으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화재 담당 국장과 동행한 손님이어서 그랬겠지만, 필자 일행을 자원봉사자 權花子씨가 안내했다. 30代 주부인 그는 소수서원에 관해 대단히 요령 있게 설명해 주었다. 일류 안내자의 도움까지 받았던 만큼 우리나라 전통 書院의 참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書院 뒤덮은 赤松 숲과 日本 국보 제1호
소수서원은 조선 中宗 37년(1542)에 豊基(풍기)군수 周世鵬(주세붕)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祖宗인 회헌 安珦(안향)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이듬해 白雲洞(백운동)서원을 세움으로써 출발했다. 당시 순흥은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다. 원래 여기에 宿水寺(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순흥에서 태어나 성장한 회헌 선생이 여기서 독학했다.
회헌 安珦(1243∼1306)은 특권화한 불교의 폐해로 온 나라가 흔들리던 고려왕조 말기에 통치기반의 안정을 위해 元나라에 가서 朱子學(주자학)을 배워 국내에 보급한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다. 선생의 死後, 1318년 충숙왕은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궁중의 화원에게 명하여 元나라 화공이 그린 선생의 영정을 모본으로 다시 그리게 했다. 그것이 현재 소수서원 內 영정각에 봉안되어 있다.
회헌 安珦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都僉議中贊(도첨의중찬) 修文殿太學士(수문전태학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全사재를 털어 육영재단 養賢庫(양현고)를 세우고 贍學錢(섬학전)을 마련,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되고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이 되면서 그는 東方道學의 鼻祖(비조)로서 더욱 추앙받게 되었다. 시호는 文成公이다.
이 서원의 格을 한층 더 높인 분이 退溪 李滉(퇴계 이황)이다. 조선 明宗 4년(1549) 풍기군수에 재임중이던 퇴계는 백운동서원을 나라의 공식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기 위해 임금의 賜額(사액)을 요청했다. 그 이듬해, 明宗은 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전답, 서적 등을 하사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서원이 되었다.
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赤松群落(적송군락)과 마주한다. 적송은 이름 그대로 겉과 속이 모두 붉다. 신라인들은 적송으로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을 빚어 냈다. 그 중 하나가 7세기 초 일본에 건너가 일본 國寶 제1호가 되었다.
신라가 기증한 日本 國寶 제1호 木造 彌勒半跏思惟像(미륵반가사유상)에 대해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일찍이 『진실로 완벽한 인간 실존의 최고 경지를 조금의 미혹도 없이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고 찬탄한 바 있다. 일본 땅에는 적송이 자라지 않는다. 영주 향토지엔 그것을 신라 때 이 고장(당시 奈己郡) 사람이 이 고장 적송으로 만든 것이라 쓰여 있다. 필자로선 확인은 어렵지만, 그럴 듯한 얘기다.
日本 國寶 제1호는 신라 때 만든 우리 國寶 제83호 金銅(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쌍둥이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메이드 인 신라」일 것 같다. 소백산 일대는 국내에서 가장 질 좋은 적송의 자생지다.
서원 창설자 周世鵬이 「敬」 자를 바위에 새긴 까닭
소수서원 경내는 수령 300년 이상 되는 적송 수백 그루와 오래된 은행나무 숲이 뒤덮고 있다. 이곳에선 적송을 「學者樹」(학자수)라고 부른다. 서원 학생들이 적송처럼 꿋꿋하게 자라 참 선비가 되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숲속길 오른쪽으로 보물 제59호 宿水寺趾(숙수사지) 당간지주가 보인다. 통일신라 때 창건된 이 절은 조선조 世祖 3년(1457), 「官軍의 방화」로 폐허화했는데, 이곳이 숙수사의 옛터라는 사실을 이 당간지주 하나가 홀로 증명하고 있다.
이쯤에서 소수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竹溪川(죽계천)의 맑은 물이 눈에 들어온다. 소백산을 발원지로 하는 죽계천은 낙동강의 원류 중 하나다.
세조 3년(1457) 10월, 端宗 復位(단종 복위)거사의 실패로, 그 본거지였던 순흥도호부의 백성들과 선비들은 토벌군에 의해 떼죽음을 당했다. 그 시신들이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그 핏물이 20리 밖 안정면 동촌리까지 흘러가 그 동네를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이른바 丁丑之變(정축지변)이다.
죽계천 건너편 큰 바위에 새겨진 「敬」이라는 붉은 글씨가 눈길을 끈다. 敬이라면 유교의 근본사상인 敬天愛人(경천애인)에서 따온 것 같다. 서원의 창설자 周世鵬이 정축지변의 참상을 전해 듣고 그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직접 써서 陰刻(음각)과 붉은 칠을 하게 한 뒤 여기서 정성들여 제사 지냈다고 한다. 「敬」자 바로 위에는 「白雲洞」이라는 글자도 새겨 있는데, 이것은 퇴계의 글씨다.
숲속길이 끝나는 무렵에 죽계천변에 「景濂亭」(경렴정)이라 쓰인 참한 정자 하나가 서 있다. 1543년 周世鵬이 지었다고 한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의 제자인 초서의 대가 黃耆老(황기로)가 썼다. 이제는 우리 전통적인 서원의 모습을 살필 차례다.
講學堂에 툇마루를 두른 까닭
소수서원의 대문인 紅箭門(홍전문: 홍살문) 바로 앞에 흙으로 돋운 壇(단) 하나가 보인다. 홍전문의 처마 밑에는 붉은 화살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先賢(선현)의 위폐를 모시는 사당 또는 임금이 인정한 충신·효자·열녀 등을 배출한 마을에 세우는 旌閭門(정려문)이다.
홍전문을 지나면 동쪽에 門成公廟(문성공묘)가 있다. 文成公 안향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安軸(안축)·安輔(안보) 형제와 주세붕을 배향했다. 안축은 景幾體歌(경기체가)인 「關東別曲」(관동별곡)과 「竹溪別曲」(죽계별곡)을 지은 고려 말기의 저명한 문필가이며, 안보는 東京留守(동경유수:경주)를 지낸 대학자다. 이 祀廟(사묘)에선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초정일 文成公을 제향하고 있다.
문성공묘 서쪽에는 講學堂(강학당)이 있다. 이곳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이다. 배흘림기둥을 세운 건물 사방으로 툇마루를 빙 둘러 놓은 前廳後室(전청후실)의 양식이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던 유생이 밖으로 나갈 때 감히 스승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을 쳐서 물러나도록 만든 구조인 것이다.
이렇게 서원에는 興學養士(흥학양사), 즉 학교 기능의 강학당 그리고 尊賢祭享(존현제향), 즉 제사 기능의 사당이 있다. 소수서원의 강학당과 사당의 배치는 좀 특이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은 前學後廟(전학후묘)라 해서 학교를 앞세우고 사당을 뒤에 두는 중국식을 따르고 있지만, 소수서원은 동쪽에 학교, 서쪽에 사당을 둔 東學西廟(동학서묘)다.
사당과 강학당 구역 바로 뒤에는 直方齎(직방재)와 日新齎(일신재)란 현판이 붙은 건물 하나가 있다. 서쪽의 직방재는 소수서원의 원장, 동쪽의 일신재는 교수들의 숙소다. 그 중간방은 諸任(제임), 즉 행정요원들의 방이다.
그 서쪽에는 장서각이 있다. 오늘날의 대학도서관인데,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御製本(어제본)을 비롯, 3000여 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책은 座右之先(좌우지선)의 예에 따라 으뜸 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 숙소보다 오른쪽에 세워진 것이다. 허헌영정은 장서각 뒤편 영정각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쓸 것이다.
원장실과 교수실 뒤로는 學求齋(학구재)와 至樂齋(지락재)가 있는데, 유생들의 기숙사다. 학문을 상징하는 「三」을 취하여 세 칸으로 지었고, 공부 잘하라는 뜻으로 건물 立面이 「工」 자로 되어 있다.
학생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에 따라 두 채의 학생기숙사가 원장실과 교수실 구역에서 훨씬 물러나 동쪽으로 치우쳐 세워져 있는 점도 흥미롭다. 제자는 스승의 발치 바로 밑에서도 잠들 수 없는 것이다.
大人君子의 온화함 표현한 걸작
서원 마당엔 해시계가 설치된 日影臺(일영대), 서원 사람들의 밤나들이를 위해 관솔불을 켜놓았던 庭燎臺(정료대)도 있다. 또 서원 담벼락 밖 죽계천변에는 『滄浪(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纓)을 씻는다(濯)』는 맹자의 말씀을 좇아 망명한 濯纓臺(탁영대), 柳雲龍(류운룡: 임진왜란 당시의 名재상 柳成龍의 친형)이 이곳 풍기군수 시절에 판 연못 濁淸池(탁청지) 등이 있다.
회헌영정은 좌측 30도 각도에서 그린 반신상이다. 서원 창설 초에 위패와 함께 봉안되었다. 창설자 주세붕은 「安文成公遺像跋文」(안문성공유상발문)에서 그 경과와 첫 참배 때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遺像=影幀).
<公의 유상은 본래 순흥부 향교에 있었는데, 丁丑之變으로 순흥부가 폐지되면서 서울에 있는 회헌 宗家로 옮겨졌다. 내가 앞서 公의 종손인 前 注書(주서:승정원의 정7품 벼슬) 安珽(안정)의 집에서 영정에 참배하며 바라보매 엄엄하고 가까이하면 온화하여, 실로 大人君子의 모습이어서 마음에 직접 뵙는 듯하여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영정에 나타난 안향 선생은 낮고 검은 儒巾(유건)에 주황색 도포 차림이다. 눈은 동그란 편이며 눈썹은 한 一字 형인데, 미간이 넓다. 코는 곧고 입술은 단정하며 수염은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다음은 다시 주세붕의 발문.
<계묘년(中宗 38년=1543년) 3월, 公의 증손이 사당 건립 소식을 듣고 영정을 모시고 내려와 임시로 고을 서쪽 다락에 모셨다가, 그해 8월 비로소 새 사당에 봉안했다. …사당에 봉안하는 날 父老子弟 백여 명이 목욕재계하고 조심히 맞이했으며, 온 城中이 나서서 보았으니 실로 士林의 盛事(성사)였다. 내내토록 公의 사당을 공경하여 받들면 우리 儒道를 떨쳐일으킴에 보탬이 크리라>
안향 선생은 충렬왕 12년(1286)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朱子學을 깊이 연구하여 원의 順帝(순제)에 의해 安子로 칭송되었다. 귀국시에는 朱子全書(주자전서)를 필사하여 국내에 널리 전했다. 이로써 종래엔 訓♥(훈고)·記誦(기송)에만 주력해 오던 우리 儒學(유학)이 철학과 실천의 학문으로 도약한 것이다.
회헌영정을 그린 年代 둘러싼 시비
회헌영정에는 회헌의 아들 于器(우기)의 讚記(찬기)가 적혀 있어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찬기에서는 충숙왕 5년(1318년)에 그려졌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문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회헌實記에는 「李退溪가 풍기군수일 무렵(明宗 3∼4년) 그 영정은 이미 몹시 낡아 헤어지고 떨어져 본모습을 알아보기 어렵게 된 지경이라, 그 본모습을 잃을까 두려워, 영정에 채색을 덧입혔다」는 구절이 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명종 13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張文輔(장문보)도 예조판서 沈通源(심통원)에게 보낸 私信에서 『지금 고쳐 꾸미지 않으면 방불한 형용이 아주 없어질까 두렵다』고 걱정하면서 대책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다음은 沈通源의 회답.
<安文成公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비조이며, 조정의 대신입니다. 후인들이 사모하여 우러를 것은 다만 遺像(유상)인데, 그같이 낡아서 형용을 잃을 지경이라면, 어찌 자손된 이들만의 한스러움이겠습니까. 마침 솜씨 높은 畵員 李不害(이불해)가 集慶殿(집경전)의 그림 일로 경주에 가 있는데…그리로 가게 하려니와 거기서도 소수서원 원장과 의논해서 정중한 인사와 후한 예물로 간청하면 마음껏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昇平文獻錄)
그러나 장문보 군수는 곧 친상을 당해 귀향하고 후임으로 朴承任이 부임했다. 박승임도 이듬해인 명종 14년(1559) 경상감사 李戡(이감)에게 회헌영정 改修(개수)의 필요성을 보고했다. 이 보고가 예조에 移文(이문)되고, 예조는 『화원 이불해를 역마에 태워 내려보내 그리게 하여 길이 전하도록 함이 어떠하올지』라고 상주,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한 미술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